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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좋은 국가, 사민주의가 생각하는 국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8.22
첨부파일0
조회수
831
내용

“충분히 좋은 국가(enough good state)”

또는 헤겔의 “사회적 국가”(social state)[1]

 ― 사회민주주의의 철학적, 정신분석학적 근거



홍준기(프로이트․라깡 정신분석연구소 소장)



[글을 시작하며]

 

나는 이번 호 <사민저널>의 특집 주제인 ‘불평등’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하여 사회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국가의 개념에 대한 논의로 글의 주제를 확장하고자 한다. 국가를 억압적 기구로 규정하는 (신)자유주의, 공산주의와 달리 사회민주주의는 보편적이고 정의로운 국가를 필요로 한다.

 

우선 이번호와 다음호에서는 앞으로 몇 번에 걸쳐 연재할 글의 전체 요지를 개괄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앞으로 나는 사회민주주의가 요청하는 “사회적 국가” 혹은 “충분히 좋은 국가”의 개념을 근현대 철학과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논의함으로써 사회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적 국가에 대한 철학적, 정신분석학적 근거를 마련해보고자 한다.

 

 

 

1. 불평등과 자유, 사회민주주의

 

불평등과 무능, 범죄, 공산주의

 

불평등에 직면하여 각 개인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다양하다. 예를 어떤 사람은 자신이 당한 불평등을 운명 혹은 자신의 태생적 무능력의 탓으로 돌리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보상받으려고 한다. “난 원래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사는 게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전자의 태도이다. 삶에서 느끼는 불공정함과 부정의에 분노한 나머지 예컨대 ‘묻지마 범죄’를 저지르거나 비행, 심각한 일탈로 ‘원한’을 해소하는 방식이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공산주의 이론으로 회피하는 사람들도 많다. ‘지젝 현상’이 그 대표적인 증상일 것이다. 그의 이론이 앞뒤도 맞지 않으며, 특히 그가 말하는 공산주의가 현실성이 있다고 진정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지젝에 열광한다. 물론 어떤 이들은 (꼭 지젝 식의 공산주의가 아니더라도) 공산주의가 진정한 답이라고 믿기도 한다.

 

공산주의 이론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으므로 각자는 자신의 성격 혹은 ‘환상’에 맞는 이론을 선택하여 현실의 답답함을 극복하고자 한다. 어떤 이는 여전히 혁명에 희망을 걸고 어떤 사람은 개인주의적 공산주의 혹은 조합주의적 공산주의 이론을 신봉하며, 또 다른 사람은 각 ‘개인’이 ‘자발적으로’ 결합해 하나가 되는 안토니오 네그리 식의 자유로운 공동체(꼬뮌주의 혹은 꼬뮌주의적 공산주의)를 꿈꾼다. 물론 불안이나 위선 혹은 비겁함의 등 뒤에 숨거나 말 뿐인 공허한 이론으로 도피하지 않고, 자신과 타인을 위해 진정성 있게 투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불평등을 영구적으로 고착시키기를 원하는 사람은 현존하는 사회적 불평등을 통해 이익을 얻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물론 예외는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예외적 인물들을 존경한다). 예를 들면 엘리트 계층에 속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인적, 물적 자원으로 항상 안락한 삶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불평등을 영구불변한 진리 혹은 당연한 삶의 원리로 믿으며,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파하고자 한다. 어찌 보면 이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문제는 자신에게 불리한 이론을 오히려 더욱 열심히 믿으면서 사회적 불평등의 당위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자기에게 불리한 이론과 신념을 적극적으로 믿고 따르는 일이 가능할까?

 

사실 이러한 질문 자체가 이미 우문일 것이다. 이 사회 속에는 자신에게 불리한 신념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은밀하고 교묘하게,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잘못된 확신으로 몰아가는 (정치적, 경제적, 철학적, 심리적, 종교적) 담론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 말이다.

 

 

불평등이 당연한 현실이 된 이유: 담론의 상상적 효과

 

그런 담론 중의 하나로 예컨대 신자유주의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인 소위 ‘낙수 효과’ 이론을 생각해보자. 이 이론에 따르면 부자들과 대기업의 세금을 깎아주는 등의 방식으로 상류층에게 돈을 더 많이 몰아주면 투자와 경제성장이 가속화되어 모두가 더 잘 살게 될 거리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직장인들은 가능한 한 적은 돈을 받으면서도(심지어 정규직 일자리를 요구하지도 않으면서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빈부 격차를 유발시켜 불평등을 고착시키며 직장인은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이러한 잘못된 이론이 국민들에게 그들을 위한 가장 훌륭한 이론이라고 설파되고 있다. 문제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렇듯 자신에게 불리한 이론을 믿고 따른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들의 삶은 곪아갔고, 이는 세월호 사건, 윤 일병 집단구타 사망 사건 등 최악의 병리적 모습으로 등장해 우리를 경악케 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세월호 사건을 통해 우리 자신과 사회 속에 숨져져 있는 치부의 끝을 보았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하에 숨겨진 불의와 부패, 폭력성,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스런 욕망, 타락, 생명과 인권의 경시, 공무원과 국가 관료들의 뻔뻔스런 책임 회피와 이기적인 당파주의,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묵과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역시 마찬가지로 기회주의적인 야당들.... 열거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사회민주주의가 자유뿐만 아니라 평등(혹은 정의)이라는 가치를 동시에 강조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가 인류의 역사적,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탁월한 유산 중 하나이다. 평등(물론 기계적 평등이 아니다)이 실현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자유라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나 가치조차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와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물론 자유주의자들도 평등을 무시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데, 하지만 그들의 철학은 진정성과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자유주의 이념을 철저하게 받아들이는 나라와 사회민주주의 혹은 사회적 국가 이념을 받아들인 나라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은 침묵하고 싶어 한다.

 

 

 

 

2. 자유주의자들에 있어서 자유 개념의 모호성 혹은 일면성

 

이사야 벌린(Isajah Berlin)의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무척 제한적이다. 이 점에 대해 살펴보자. 자유에 관하여 자유주의자들이 쓴 수많은 글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사야 벌린(Isajah Berlin)이 쓴 「자유의 두 개념」이라는 제목의 논문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 가장 많이 인용되는 글 중 하나이다(이사야 벌린, 박동천 옮김, 『자유론』, 아카넷, 2006).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사야 벌린은 자유를 소극적 자유적극적 자유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소극적 자유만을 고유한 의미의 자유로 간주한다.

 

그에 따르면 적극적 자유에서 “적극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자신의 주인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뜻한다. 적극적 자유는, “나는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고 싶다” 혹은 “하나의 물체, 동물 또는 노예와는 달리 인간으로서의 역할 ― 즉 나 자신의 목표 및 계획을 고안하여 그것을 실현시키는 역할 ― 을 수행할 수 있기를 원한다는 각 개인의 소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360쪽). 이에 반해 소극적 자유란 “다른 사람 어느 누구도 내 활동에 개입하여 간섭하지 않는 만큼 내가 자유롭다”(344쪽)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글을 읽기 시작할 때 처음에는 그가 마치 평등이나 적극적 자유를 소극적 자유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듯한 느낌을 받지만, 우리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의 논의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오히려 벌린은 적극적 자유 개념을 비판하는데 그 이유는 더욱 놀랍다.

 

그 논문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그 논문은 사회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궤변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실망스러운 논리에 입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적극적 자유는 개인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실현한다는 명목 하에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 혹은 공산주의로 귀결되는 자유를 의미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이사야 벌린은 진정한 자유주의 이론가에 속한다.

 

적극적 자유는 전체주의로 귀결?

 

그가 범하고 있는 대표적인 오류는 ‘적극적 자유에 대한 옹호는 반드시 전체주의나 공산주의로 귀결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평등과 자유는 서로 개념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정의, 평등 및 이웃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 내가 포기하는 것은 어쨌든 자유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 자유를 희생함으로써 자유를 증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유는 자유일 뿐 평등, 공평, 정의, 문화, 인류의 행복, 마음 깊은 곳의 양심 등 그 어느 것과도 동등한 것이 아니다.”(349쪽)

 

형식 논리의 극치 아닌가? 자유는 자유이고 평등은 평등이니 자유와 평등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논리를 더 발전시키면, ‘나는 나의 자유를 지킬 수만 있다면 평등, 정의, 양심을 저버려도 상관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당연히 벌린은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싶지는 않을 것이므로 단서를 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개인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평등이 심각하게 침해될 때에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벌린이 강변하듯이, 만약 자유가 평등, 양심, 정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왜 내가 평등과 정의, 양심을 위해서, 즉 타인을 위해서, 나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단 말인가? 평등과 정의, 양심을 위해서 나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벌린의 말이 조금이라도 논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설득력이 있으려면, 나의 자유가 ‘이미 애초부터’ 정의와 양심, 평등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양심도 없고 정의감도 없는 사람이라면 왜 내가 타인을 위해 나의 자유를 제한하려고 하겠는가? 오히려 타인의 권리를 짓밟으면서도 아무런 느낌도 죄책감도 없이, 나의 자유가 실현되었다고 쾌재를 불러야만 하지 않겠는가?

 

소극적 자유와 정의, 평등

 

이번에는 벌린이 그토록 열렬하게 옹호하는 소극적 자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는 소극적 자유, 즉 “종교, 의견, 표현, 재산의 자유만은 반드시 자의적 침해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350쪽)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중시하는 소극적 자유가 과연 정의, 평등과 무관한가?

 

예컨대 자발적으로 내가 나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가령 내가 회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데, 하지만 해고당할 것이 두려워 나는 나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 그런데 이 때 내가 포기하는 것은 단지 나의 자유뿐만이 아니다. 나는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나에 대한, 나를 위한, 나 자신의 정의감과 양심을 배반하고 있는 셈이다. 즉 벌린이 말하는 소극적 자유조차 정의와 양심, 평등의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벌린의 논리 구조에 따르면 그 상황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것이다. ‘당신이 표현의 자유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것은 양심과 정의, 평등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단지 당신은 불안 혹은 두려움 때문에,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신의 무능력 때문에, 자유를 지키지 못한 것뿐이다.’

 

하지만 타인들(예컨대 직장 동료나 상사, 혹은 노동위원회 등)이 거의 일방적으로 고용주 편을 드는 경향이 매우 강한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 내가 살고 있다면, 그리고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대다수 사람들이 정의감이 없거나 양심적이지 못하여 나를 옹호해 줄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 나는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회사에 맞서 나의 표현의 자유를 관철시킬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하다.

 

다시 말해서 오직 타인들이 나의 자유를 지켜주고자 하는 정의감과 양심을 갖고 있고 불평등에 대한 분노심을 갖고 있을 때에만이, 그들의 도움으로, 그들과의 심리적, 현실적 ‘연대’를 통해, 나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의 표현의 자유(소극적 자유)마저 스스로 지켜낼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는 자유일 뿐이며, 평등과 양심, 정의를 자유와 결부시키지 말라’는 이사야 벌린 식의 자유주의 궤변은,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사회적 강자를 위해 약자의 자유를 희생시키는 진짜 전체주의적 논리로 귀결된다.

 

자유주의는 결국 ‘강자의 자유’를 옹호

 

벌린 식의 자유론은 경제 발전을 위해서 부자들에게 더 많은 몫을 주어야 한다는 ‘낙수 이론’ 같은 궤변을 깔끔하게 정당화할 수 있다. 경제 성장이라는 대의를 위해서는 약자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항상 약자들의 자유만 제약되어야 하는가? 벌린 식의 자유주의에 따르면, 그 어떤 경우든 강자는 자신의 자유를 자발적으로 제약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강자의 자유는 양심과 정의, 평등의 문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 현실에서 자신의 자유를 관철할 힘이 있는데, 왜 강자가 자신의 자유를 자발적으로 제약하겠는가?

 

벌린의 자유론은 결국 사회적 강자들만이 ㅡ 벌린 자신이 전체주의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는 ㅡ 적극적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사실상 함축하고 있는 이론이며, 이러한 ‘적나라한 현실’을 옹호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벌린을 포함한 자유주의 이론, 즉 존 로크로부터 출발하여 오늘날의 하이에크와 밀튼 프리드만 또는 노직과 같은 신자유주의자들에서 그 절정에 달하는 자유주의 철학의 귀결이다.

 

이처럼 벌린의 자유론이 갖는 근본적 한계는 그가 ‘적극적 자유’를 아예 인정하지 않거나, 또는 가끔 인정하는 제스처를 취할 때가 이다 하더라도 결국은 구색 맞추기 용으로 ‘아주 조금만’ 인정하고 있다는데 있다. 그리고 이 점은 로크 이후로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해 온 핵심적 이념으로 지금까지 자리잡아온 (신)자유주의 철학과 경제 이론의 근본적인 한계이다.

 

 

 

 

3. 자유와 평등은 국가 속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헤겔의 『법철학』과 사회민주주의

 

또한 자유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견해에 따라 벌린은 헤겔마르크스를 전혀 구별하지 않고 양자의 이론을 모두 전체주의나 독재로 이끄는 적극적 자유의 주창자로 간주한다. 하지만 헤겔과 맑스 이론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과장되었거나 아니면 무지에 근거한 이야기라고 할 수밖에 없는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닌가?(헤겔의 국가론이 갖는 사회민주주의적 의미에 대해서는 앞으로 상세히 논의할 것이다.) 결국 벌린이 하고 싶은 말은 자유는 ‘궁극적으로’ 소극적 자유밖에 없다는 것이며 소극적 자유의 보장, 즉 강자의 자유의 보장을 위해 국가와 사회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적극적 자유와 평등

 

헤겔의 법철학과 거기에서 제시된 국가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는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하므로 우선 여기에서는 먼저 다음과 같은 논제를 제시하고 지나가고자 한다. 잘 알고 있듯이 (신)자유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국가를 억압적인 기구로 간주하며, 따라서 국가의 최소한의 개입 혹은 국가의 철폐를 주장한다. 반면 헤겔은 오히려 (자본주의적) 시민사회가 야기하는 여러 문제들―소외, 빈곤,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심급으로서 보편적’이고 ‘윤리적’인 국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국가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철저하게 철학적, 사회과학적으로 탐구한 최초의, 그리고 ‘성공한’ 철학자로서 ‘사회민주주의 국가론의 진정한 선구자’이다.

『법철학』을 출간(1821년)한 이후 오랫동안 헤겔은 ‘프러시아의 반동철학자’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맑스 역시 헤겔의 국가론 비판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사정으로 오랫동안 헤겔의 『법철학』은 주목받지 못했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독일의 저명한 헤겔 연구가인 디터 헨리히(Dieter Henrich)가 지적하듯이 (예컨대 『논리학』이나 『정신현상학』이 아니라) 헤겔의 저서 중 『법철학』이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작”이 되었다는 것은 진정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헤겔이 열정적으로 옹호했던 보편적, 사회적 국가 혹은 인륜적 국가(즉 윤리적 국가)가 다름 아닌 오늘날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을 통해 실제적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물론 현존하는 사회민주주의 국가가 완벽한 이상적 국가라는 말은 아니다).

언급했듯이 헤겔은 우파좌파 모두에 의해, 특히 그의 국가론 때문에 가장 문제 많은 철학자로 간주되어 왔다. 급진적 자유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에게 헤겔은 처음부터 ‘프러시아의 수구적인 보수 철학자’로 낙인찍혔다. 그리고 칼 포퍼나 벌린 혹은 대부분의 보수주의적인 현대적 자유주의자들은 헤겔을 전체주의자로 손쉽게 비난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 인문학계에서는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보다는 들뢰즈, 네그리, 바디우 등과 같은 영향력 있는 ‘유명한’ 현대프랑스 철학자들을 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 자체야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 철학자들이 서로 견해가 달라서 서로 비판도 많이 하지만 헤겔을 비판하는 데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헤겔은 여전히 목적론적 형이상학자, 전체주의자, 보수주의자인 것이다(하지만 지젝은 오히려 반대로 헤겔을 공산주의 이론가로 재해석한다. 이러한 경향 역시 물론 문제다).

 

헤겔에 대한 오해와 낙인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이러한 헤겔 이미지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루돌프 폰 하임(R. von Haym)의 『헤겔과 그의 시대에 대한 강의(Vorlesungen über Hegel und seine Zeit)』(1857)이다. 물론 맑스의 『법철학 비판』도 이러한 헤겔 이미지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맑스나 레닌은 헤겔을 보수주의자라고 철저하게 비판했지만 긍정적 의미도 추출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도 헤겔의 국가론에 담긴 긍정적 의미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 국가는 부르주아의 철저한 도구였고 철폐되어야 할 근본악에 지나지 않았다. 헤겔 『법철학』의 긍정적 의미를 날카롭게 꿰뚫어볼 수 있었던 『옥중수고』의 그람시도 결국은 이 점에서 맑스와 레닌을 벗어날 수 없었다.

 

 

벌린

소극적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이고 적극적 자유는 맑스, 헤겔식의 전체주의로 귀결될 뿐이다.

헤겔

소극적 자유는 물론 적극적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위해 “사회적 국가”가 필요하다.

맑스/레닌/그람시

국가는 억압적 기구이므로 철폐되어야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국가 폐지로 이끄는 유일한 방법이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문제점들이 서구 사회에 알려지면서 헤겔 철학을 진보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하는 시도가 더욱 많이 생겨났다. 마르쿠제도 『이성과 혁명』과 같은 저작을 통해 헤겔 철학을 진보적으로 해석하고자 했으며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맑스의 이론 틀 속에서 헤겔을 수용한다는 한계를 보였다. 즉 헤겔 국가론의 긍정적 의미에 대한 언급이 마르쿠제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 쓰여진 루카치의 『청년 헤겔』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저자인 칼 포퍼도 헤겔을 보수주의적인 전체주의자로 각인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저자이다. 심지어 포퍼는 헤겔과 맑스 이론을 사실상 구분하지 않고 뭉뚱그려 ‘열린 사회의 적’으로 규정한다. 포퍼가 헤겔과 맑스를 이론적으로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포퍼에게 중요한 유일한 이념은 자유주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헤겔을 보수적이지 않은 철학자로 수용하는 경향이 늘어났고 오늘날 ‘진지한 전문적인’ 헤겔 연구자 중에서 헤겔이 서술한 국가를 보수적인 혹은 전체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진 헤겔 연구자들은 여전히 헤겔 국가론의 ‘사회민주주의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거나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프랑스 스피노자 공산주의 철학자들의 헤겔 비판

 

반대로 특히 프랑스의 스피노자 전문가 중에서는 헤겔을 보수적인 철학자로 지금도 통렬하게 공격하는 이론가가 많다. 프랑스에서의 스피노자 연구의 특징이 스피노자를 공산주의 이론과 연결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해 공정하지 못한 처사일 뿐만 스피노자 철학이 갖는 긍정적 의미를 훼손하는 것이다. 어떻게 스피노자가 공산주의자란 말인가? 철학적 재해석은 물론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상가의 철학을 재해석할 때는 그것이 갖는 역사적, 철학적 맥락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프랑스철학자들의 스피노자에 대한 공산주의적 해석은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과도하게 해석의 자유를 남용하고 있다! 네그리, 들뢰즈, 마슈레 등 주로 프랑스의 현대철학자들과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 받은 국내외의 몇몇 학자들은 스피노자를 공산주의자로 ‘억지로’ 해석하면서 이와 동시에 여전히 헤겔을 여전히 ‘보수주의자’로 간주한다. 사실 이는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들이 헤겔이 사회민주주의의 선구자라는 것을 알리도 없지만,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헤겔은 여전히 보수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자들의 눈에 사회민주주의는 당연히 보수적인 체제이니 말이다! 프랑스철학에서의 스피노자 연구와 헤겔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긴 설명을 필요로 하므로 후에 따로 항목을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헤겔의 국가론 및 그것의 해석의 역사 등 본격적인 상세한 논의는 일단 뒤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특히 헤겔의 사회민주주의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몇몇 구절을 인용하고 지나가기로 하자.

 

“사회 성원에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일정한 생계의 규모는 저절로 정해지기 마련인데, 많은 대중이 그 정도의 생활수준을 밑도는 상태로 영락하게 됨으로써 정의감이나 준법정신이나 스스로의 활동과 노동으로 생활을 유지한다는 데 대한 자긍심을 상실하기에 이를 때, 이것이 천민(Pöbel)의 출현을 가져오게 된다. 이것은 동시에 소수인의 수중에 과도한 부가 집중되는 것을 더욱 용이하게 한다.”(헤겔, 임석진 옮김, 『법철학』, 한길사 , ξ 244)

 

“욕구의 체계[시민사회: 나]에서는 각 개인의 생계와 복지는 가능성으로서 있을 뿐 그것의 실현 여부는 개인의 자의나 타고난 특성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욕구의 객관적 체계에 의해 좌우된다. 사법활동을 통해서는 재산과 인격의 침해가 제거될 뿐이다. 그러나 법이 특수한 생활영역에 현실로 등장하면 이러저러한 목적[생계와 복지: 나]을 방해하는 우연성이 제거되고 인격과 재산의 안정이 확고히 지켜지며, 또한 개인의 생계와 복지가 확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로써 특수한 개인의 복지가 권리이며 법으로서 취급되고 또 실현되어야 한다.”(『법철학』, ξ 231, 강조는 나.)

 

“근대국가의 본질은 공동적인 것특수성의 완전한 자유와 개인의 행복으로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따라서 가족과 시민사회의 이익이 국가에 총괄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목적의 보편성은 스스로의 권리를 보존하지 않을 수 없는 특수한 존재의 독자적인 지와 의욕 없이는 전진할 수 없다는 것, 바로 이 점에 있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것은 실현되어 있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성도 활력에 넘치는 발전을 해가야 하는 것이다. 이 두 요소가 든든한 바탕 위에서 존속함으로써만 비로소 국가는 각 부분이 조직화한, 참으로 유기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법철학』, ξ 244, 강조는 나)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헤겔은 자유와 평등,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개인의 특수성과 주체성, 그리고 공공의 선, 복지와 정의 등 사회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주제들을 국가 이론의 틀 속에서 종합적으로 사유하고 있다.

 

각 개인은 성장을 위해 “충분히 좋은 엄마”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성인이라고 할지라도 각 개인은 타자의 도움 없이 고립되어서는 생존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충분히 좋은 국가” 혹은 “사회적 국가”를 요청한다

―정신분석학적 고찰

 

“충분히 좋은 엄마”은 아이를 완전히 홀로 내버려두지 않고 아이의 신체적, 정신적 필요에 응답하는 엄마를 의미한다. 아이는 이 어머니의 도움과 개입을 통해 삶의 안정성과 기쁨을 느끼며 건강한 자기(self)로 성숙해간다. 안정적이고 연속적인 환경과 대상을 제공하는 “충분히 좋은 엄마”가 없다면 아이는 현재 혹은 미래에 심각한 정신병리 상태(자폐증, 정신분열증, 경계형 장애 혹은 심각한 신경증)에 빠지거나 ‘건강한 자아상’을 얻지 못한다. 삶과 안정성과 진정한 자기를 형성할 수 있도록 아이에게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는 이 엄마를 위니콧(Winnicott)은 “충분히 좋은 엄마”라고 불렀다.

 

오늘날 우리는 아이는 물론 성인들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는 ‘윤리적인국가’를 필요로 한다. 각 개인들에게 충분하게 심리적, 물질적 안정감을 확보해줌으로써 불안과 고통,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한 불확실성, 열등감과 패배의식, 격심한 경쟁, 폭력과 공격성, 기만과 부패 등,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온갖 장애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안전한 엄마와도 같은 국가―“충분히 좋은 국가” “사회적 국가”(헤겔)―를 절실히 요청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기에서 내가 위니콧의 개념을 변형해 만든 “충분히 좋은 국가”라는 용어의 사용을 제안하고자 한다. 물론 “충분히 좋은 국가”라는 용어의 의미가 오직 위니콧의 이론만으로 다 설명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 개념이 지닌 정신분석학적, 심리적 함의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가족관계를 넘어서 ‘충분히 좋은 엄마와 같은 국가’라는 사회이론적 의미로 확대해 사용하고자 한다. 이 개념은 특히 클라인(Klein), 그리고 비온(Bion),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라깡 정신분석이론과 다양한 정신분석가들의 기여를 비판적으로 종합합으로써만 도출될 수 있는 새로운 ‘임상적-정치철학적’ 개념이다. 물론 이것은 철학적 관점에서는 헤겔 철학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용어이며, 궁극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에서의 실천 경험에 근거하고 있는 용어이다.

 

아이의 성장에서 엄마의 돌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듯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각 개인은 자신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해주며 심리적, 경제적 안정감을 제공해주는 국가가 필요하다. 헤겔은 근대시민사회의 발흥과 더불어 생겨나는 무수한 문제들, 빈부 격차, 자유와 평등의 유린, 천민의 발생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개인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윤리적이며 사회적인 국가’의 존재를 역설하고 이의 이론적 기초를 확고히 했다. 헤겔은 시민사회의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줌으로써 시민들의 자유와 자긍심과 애국심, 그리고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을 국가의 역할로 규정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충분히 좋은 국가’라는 이 개념은 개인과 사회, 인간의 주체적인 심리적 영역과 객관적인 정치경제의 영역을 연결시켜주며, 더 나아가 사회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이론적, 실천적 개념으로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좋은 엄마”라는 정신분석적 개념을 헤겔이 제시한 “사회적 국가”와 비유적 관점에서 동일한 개념―“충분히 좋은 국가”―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유주의,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비교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서 글을 맺도록 하자.

 

자유주의

“충분히 좋은 엄마”는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아이를 돌보는 엄마다. 엄마가 아이의 교육과 복지, 행복을 위해서 개입하는 것은 아이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아이가 자신의 능력에 맞게 알아서 자율적으로 처리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최소한 개입하고 간섭하지 않는 엄마가 좋은 엄마다.

공산주의

“충분히 좋은 엄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엄마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 충분히 좋은 국가도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구일 뿐이다. 엄마(국가) 없이 각 개인이 자발적으로 활동하고 결합한 비국가적 조직인 프롤레타리아 독재 혹은 공동체만이 공산주의가 허용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 결사다.

사회민주주의

국가는 가능한 한 적극적으로 “충분히 좋은 엄마”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사회적 국가는 개인의 소극적 자유뿐만 아니라 적극적 자유가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빈곤과 고통, 질병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며, 빈부 격차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모든 개인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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