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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사회주의는 실체 없는 유령이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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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3
내용

민주적 사회주의는 실체 없는 유령이다

:공산주의, 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 차이와 쟁점 [2]



홍준기(프로이트 라깡 정신분석 연구소)



 앞의 시리즈 글의 마지막에서 나는 사회민주주의는 공산주의로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가진 문제점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어보면 이 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공산당 선언은 크게 두 가지 방식의 독해가 가능하다. 하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독해로서 폭력혁명을 거쳐 공산주의로 나아간다는 내용으로 읽어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는 폭력이라는 표현을 완화해서 읽는 방법이다. 마르크스가 난잡한 폭동 그 자체를 옹호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방점을 두어 공산당 선언을 읽으면, 그리고 더 나아가 폭력혁명과 더불어 총체적 국유화계획경제 노선 그 자체를 거부하는 사회민주주의적 태도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공산당 선언은 글자 그대로 사회민주주의의 교과서로 읽힐 수밖에 없다. 좀 길지만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제시하는 공산주의 정책을 인용해보자.

1) 토지 재산을 폐지하고, 모든 지대를 공적 목적에 충당하는 것.
2) 무거운 누진 소득
3) 모든 상속권의 폐지
4) 모든 이민자들과 반역자들의 재산 몰수
5) 국가자본과 배타적 독점권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해 국가의 손안에 신용을 집중시키는 것
6) 통신 및 운송 수단을 국가의 손안에 집중시키는 것
7) 국가가 소유하는 공장과 생산도구를 확대하고, 공동 계획에 따라 황무지를 개간 경장하고 토양 일반을 증진시키는 것
8) 모든 사람이 동등한 노동의 의무를 지는 것. 산업 군대, 특히 농업을 위한 산업 군대를 세우는 것
9) 농업과 제조업을 결합하고, 나라 전체에 걸친 보다 균등한 인구 분산을 통해 도시와 동촌의 차이를 점차 제거하는 것.
10) 모든 아동을 공립학교에서 무상교육을 시키는 것, 현재의 행태로 이루어지는 아동의 공장 노동을 폐지하는 것, 교육과 산업의 생산을 결합시키는 것 등등.
(마르크스, 엥겔스(권화현 옮김), 공산당 선언, 펭귄클래식 코리아, 254~55)
 
마르크스가 제시한 내용 중 총체적 국유화 혹은 극단적 평등주의 등과 관련된 부분을 제외한다면, 그가 말한 공산주의 정책은 진보한 사회민주주의 국가에서 오늘날 이미 역사적으로 현실화되어 실현되지 않았는가? 나라마다 내용상, 정도상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사회민주주의 정책이 후퇴하는 경향이 현재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싸워서 고쳐가야 할 불행한 사고일 뿐이다. 그러한 사태가 사회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며 따라서 공산주의가 옳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적 사회주의인가?
 
하지만 여전히 생각해보야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나 ()자유주의자들처럼 사회민주주의를 완전히 폄하하지는 않지만, 사회민주주의를 자본주의의 한 변형태로 보고자 하는 시각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라는 점이다.
 
내가 여기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특히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용어이다.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구체적으로 사용되는 이론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즉 사회민주주의나 사회주의에 관한 이론적 학문적 토론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두 용어는 사실상 동의어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용어는 겉보기보다는 더 큰 차이를 갖고 있다. 특히 윤도현 교수의 장미 강좌에 대한 청강후기의 제목에서처럼 <사회민주주의: 복지자본주의인가, 민주적 사회주의인가>라는 형태로 등장하는 문구에서 더욱 그러하다.
 
물론 이 강좌는(적어도 이 강좌의 청강후기는) 사회민주주의가 결국은 자본주의에 불과하니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청강 후기는 사회민주주의는 나쁜 것은 아니지만 민주적 사회주의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러한 논리가 현실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별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개념이 사용된 용례를 살펴보자.
 
예를 들면 게지네 슈반(Gesine Schwan)은 민주적 사회주의 개념을 보수적인 기독교적 사회주의자, 사회민주주의 우파, 그리고 보다 급진적인 사회주의자 모두를 포괄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한다(Gesine Schwan, 유럽에서의 민주적 사회주의, 윤근식 편저, 사회민주주의론참조).
 
게지네 슈반의 용법에 따르면 민주적 사회주의는 비민주적인 사회주의와 반대되는 말이다. 그리고 슈반은 민주적 사회주의 중에서 급진적인 민주적 사회주의자는 민주주의와 독재간의 대립이 아니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대립”(197)을 강조한다고 말한다.이러한 용법에 따르면 소위 급진적인민주적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사회주의자이고, ‘보수적인사회주의자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분파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자는 민주적 사회주의자인가? 게지네 슈만의 용법에 따르면 민주주의자로서 사회주의적 이념에 동조하면 결국은 모두 민주적 사회주의자이므로 사회민주주의자는 민주적 사회주의자이다.
자본주의와의 단절을 강조하는 급진적 사회주의자도 민주적 사회주의자이고, 좀 보수적인 사회주의자도 그러하다. 게지네의 논문은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아무런 내용도 없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주의의 의미는 무척이나 다양하다
 
왜 이런 말장난 같은 이야기로 끝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사회주의라는 말 자체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에는 공상적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 심지어 국가사회주의도 있으며, 과학적 사회주의도 있다. 심지어 마르크스도 공산당 선언에서 사회주의에 대해 언급하면서, “반동적 사회주의”, “보수적 부르주아적 사회주의”, “비판적-유토피아적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제시하고 이것들을 비판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그나마 비판적-유토피아적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가 공상적이기는 하지만 나름 긍정적 요소도 있다. 어쨌든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마르크스는 비판적-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언급하면서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사실상 동의어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반면 궁극적으로 마르크스는 자신이 주장하는 최종 목표에 공산주의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이렇듯 사회주의라는 용어의 개념이 아주 다양하기 때문에 심지어 슘페터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라는 저서에서 용어상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총체적 사회화를 달성한 사회를 지칭하는 개념으로만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의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 동의어라고 덧붙인다. 차라리 슘페터처럼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용어상의 다의성으로 인한 사유의 혼란을 피하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한다.
 
복지 자본주의가 아니라 혼합경제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 복지자본주의인가, 민주적 사회주의인가>라는 문구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그 점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사실 그 문구 자체가 모호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가 복지 자본주의로 끝나지 않으려면 민주적 사회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말, 복지자본주의가 아닌 사회민주주의, 즉 민주적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이 점이 모호한 것이다.
 
사실 사회민주주의의 내용은 결코 모호하지 않다. 사회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사회민주주의 정책이 뭐냐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사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이 쓴 여러 책들만 보아도 사회민주주의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나라마다 다소 다르지만 그럼에도 사회민주주의는 분명한 공통적인 지향점과 실천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최종 목표를 이야기하면서, 그에 반해 사회민주주의의 궁극적 지향점이 복지 자본주의에 불과하다고 폄하하여 말한다면 다시금 혼란이 일어난다.
 
우선 '복지 자본주의'라는 표현은 자유주의적 복지국가와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 사이의 차이(이 차이는 매우 크다!)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에스핑-엔더슨에 따르면 복지국가에는 자유주의적(시혜적, 잔여적) 복지국가, 유럽 대륙형(조합주의적) 복지국가, 그리고 북유럽형(보편주의적) 복지국가가 있다. 다시 말해서, 복지 자본주의라는 것도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에스핑-엔더슨(박시종 옮김), 복지 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7 참조).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보한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적 요소와 사회주의적 요소를 혼합한, 즉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수반하는 혼합경제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복지자본주의냐 민주적 사회주의냐는 식의 이분법적 논의는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가 자본주의 경제(복지를 조금 가민한)가 아니라 혼합경제라는 점을 완전히 시야에서 놓치고 있다.
 
민주적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 복지 자본주의인가 민주적 사회주의인가>라는 말이,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불과하고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결국 민주적 사회주의, 즉 슘페터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사회주의(즉 공산주의)를 궁극적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공허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것은 존재하지도 않는공산주의를 최종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실현된 공산주의인 사회민주주의를 사실상 건너 뛸 수도 있는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며 사실상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폄하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윤도현 교수 청강후기의 저자는 나 개인적으로는 윤도현 교수 역시 사회민주주의의 최종 목표를 복지 자본주의를 넘어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 실현까지 염두에 두고 있어서 상당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나는 청강후기의 필자가 최종 목표라고 주장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내용이 도대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니 역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현재, ‘지금-여기에서 실현된 공산주의인 사회민주주의에 머무르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임노동자 기금이 민주적 사회주의인가?
 
사실 윤도현 강의 청강후기의 제목으로 나온 그 문구는 신정완의 복지자본주의냐 민주적 사회주의냐라는 책의 제목을 곧 바로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책에서 신정완은 칼레비로 대표되는 스웨덴의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를 분배에만 치중하는 복지 자본주의로 지칭하고(위의 책, 219), 반면에, 비그포르스의 사상적 전통에 따라 구상된 1970년대의 임노동자 기금안을 민주적 사회주의에 입각한 정책으로 평가한다.
 
신정완의 이 저서는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그 정치경제학을 명료하게 서술한 책으로서, 접하기 어려운 스웨덴 문헌들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훌륭한 저서이며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이 책이 다루는 핵심 내용은 스웨덴의 임노동자 기금안이다. 이에 대해 간략히 요약해보자.
 
임노동자 기금안은 전통적으로 스웨덴 노조(LO)가 강력하게 추진해온 연대임금 정책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등장했다. 연대임금 정책이란 동일한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그들이 속한 기업의 수익성이나 임금지불 능력 수준에 관계없이 동일 임금을 적용받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즉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입각한 임금정책인 것이다(위의 책, 27).
 
이러한 연대임금 정책은 수익률이 높은 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기업 수익률이 높으니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고자 하는 동인이 생겨나지만, 그렇게 되면 수익률이 낮은 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임금도 상승해야 하므로 임금인상 요구는 억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대임금 정책은 성장 잠재력이 높은 거대기업에게 유리하며 소수의 사적 거대주주들에게 주식재산과 경제적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한다는 문제가 또한 생겨났다(위의 책, 27).
 
임노동자 기금안은 이러한 배경 하에서 제출되었다. 임노동자 기금안의 골자는 기업 이윤을 적립하고 그 적립금을 임노동자 집단에 의해 집단적으로 소유·관리되도록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제안은 매우 급진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총체적 사회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스웨덴 국민은 이러한 기금 제도에 지지표를 던지지 않았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자신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파트너였던 노동조합의 임노동자기금 제안 때문에 곤혹스러웠는데, 선거 직전에 노조가 임노동자 기금안을 제안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그리하여 1976년 선거에서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46년만에 처음으로 정권을 잃는다. 물론 임노동자 기금안이 선거 패배의 결정적 요인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 후 임노동자 기금안은 최초의 급진적 형태에서 완화되었고, 1982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이 재집권한 후 1983년 완화된 기금안을 통과시킨다. 사회민주당 의원은 전원 찬성, 그리고 부르주아 정당들 의원 전원이 반대했고 좌익당은 기권함으로써 수정 없이 입법안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1991년 출범한 부르주아 정당 연립정부는 기금제도 자체를 해체시켰다.
 
신정완은 임노동자 기금안은 완전히 실패였다고 평가한다. 임노동자 기금은 일반 사적 주주들과 마찬가지로 오직 수익성 기준에 따라 기금 자금을 투자하는 방식으로 활용되었고 따라서 스웨덴 경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노동자 기금이 처음 구성되었을 때 목표로 했던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목표는 완전히 사라졌다.
 
임노동자 기금은 실패했다
 
그러나 신정완의 책이 전달하고 있는 임노동자 기금에 관한 논쟁을 읽으면 의문점이 생긴다. 신정완은 스웨덴 임노동자기금 논쟁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단언하면서 무엇을 주장하고 싶은 것인가? 임노동자 기금의 완화된 형태가 실패라는 것인가, 아니면 임노동자 기금 그 자체가 실패라는 것인가?
 
임노동자 기금안의 최초 형태는 노동자들이 기금의 형태로 기업을 사실상 사회화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었고, 물론 신정완은 그것에 찬동한다. 그는 그것을 길드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복지자본주의냐 민주적 사회주의냐의 저자인 신정완은 최초의 임노동자 기금안이 비그포르스의 길드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마이드너(Meidner)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점을 중시한다. 그러나 책을 계속 읽어 나가면, 저자인 신정완이 임노동자 기금제 그 자체를 그다지 지지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LO의 기금안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경제체제 모델로서 기금 사회주의 모델을 내장하고 있었는데, 기금 사회주의 모델은 자본주의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안적 경제 체제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기금 사회주의 모델은 시장 사회주의 모델의 일종이었지만 시장경제 작동 원리에 대한 충분한 통찰이 결여된 채 마련된 모델이어서 안정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는 경제 체제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신정완이 근본적으로 스웨덴의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적 정책, 복지자본주의 정책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그가 민주적 사회주의 정책으로 간주하는 임노동자 기금안 조차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정완의 민주적 사회주의론은 실현 불가능한 최종 목표를 향해 계속 달려간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화 기획을 관철시키는 방식과 관련해서는 정치적이념적 정면 대결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한다.”
 
, 민주적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 치열하게 정치적, 이념적 투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신정완의 메시지인데, 하지만 1976년 선거 결과로 드러났듯이 스웨덴 국민들이 총체적 사회화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를 원한다면?
 
신정완이 말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란 사회화된 작은 규모의 기업들을 활성화하고 그것을 통해 진정한 노동자 자치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물론 거대기업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민주적 사회주의 국가 즉 공산주의 국가가 사회민주주의보다 더 잘 굴러갈 것이라는 어떤 선험적인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이미 존재하는 거대 기업은 또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민주적 방식으로 대기업을 사회화하는 것을 국민이 거부했으므로 대기업은 그냥 그의 말대로 복지 자본주의의 체제로 놔두고 작은 기업 단위로만 사회주의를 실현하자는 것일까? 이러한 초보적인 수준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신정완의 그 책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신정완의 개념 구조 속에서 사회민주주의는 단순히복지 자본주의에 불과하므로 그것은 (민주적) 사회주의로 넘어가야 할 과도기적 단계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한 민주적 사회주의 정책에 동의할 수 없다면, 왜 우리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는 지점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민주적 사회주의는 실체 없는 유령이다
 
또한 신정완은 실제로 사회화 기획이 실현되고 난 후에 성공적으로 경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기법을 미리 습득하기 위해서”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사회화된 기업의 모범 사례를 창출하는 것도 필요하다고말한다.
 
이러한 말 역시도 매우 역설적으로 들린다.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운영하는 사회화된 기업을 만드는 것은 그것을 하는 데 성공할 수만 있다면누구라도 하고 싶은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민주적 사회주의 국가에서 국가 경영을 잘 하기 위해서 사회화된 기업을 실험해보라고 권하는 것은 앞뒤가 바뀐 이야기다.
 
이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 최종 목표가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믿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 보았듯이 신정완이 말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내용은 나의 관점에서 본다면 실체 없는 허구 같은 것이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나는 신정완의 민주적 사회주의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또한 매우 뛰어난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신정완의 복지자본주의냐 민주적 사회주의냐라는 질문으로부터는 우리가 취해야 할 어떠한 현실적인정책도 추론해낼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윤도현 교수 청강후기는 복지 자본주의가 아닌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최종 목표를 제시하고 이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하지만 그 민주적 사회주의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 이것이 명확히 대답이 되지 않는 한, 최종 목표를 주장하는 것은 공허하며 무의미하다. 더구나 그러한 주장은 사회민주주의가 복지 자본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즉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그다지 생산적이지 못한 결론을 마찬가지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사민저널(www.sdjournal.kr) 3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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