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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바디우의 공산주의 비판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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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824
내용

지젝-바디우의 공산주의 비판

:공산주의, 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 차이와 쟁점 시리즈 1



홍준기(프로이트 라깡 정신분석 연구소)


그것은 꿈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이다


한국사회의 절망적 상황에 대한 예로서 우리는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 혹은 논문이나 저서에도 가난한 청년/대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등록금을 내려고 알바 하느라 공부를 할 수 없다.”, “돈이 없는 가난한 대학생에겐 연애도 사랑도 사치에 불과하다.”... 돈이 없어 공부도 연애도 사랑도 사치인 나라,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가질 수조차 없는 힘든 사회, 비정규직이 50%를 넘는 나라.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1위인나라, 그리고 정부의 복지지출이 꼴찌인 나라 등등. 이것이 매체를 통해 흔하게 접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상황이 너무 열악하거나 고통스러우면 우리는 백일몽에 잠기거나 공상에 빠지게 된다. 예컨대 이런 공상이다. 


“다음과 같은 나라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보수적인 정당에서는 대학생들에게 학비를 받지 않으니 대학교육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학생들이 태만해지므로 학생들에게 한 한기에 75만 원 정도의 등록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해. 반대로 진보적인 다른 정당에서는 교육은 개인의 존엄성과 관련되는 기본권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장래가 걸린 중차대한 일이므로 우리의 아이들의 교육은 국가 전체가 부담해 무료로 대학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지?”


그런데 이 논쟁은 가상적 논쟁이 아니라 한 때 독일에서 벌어졌던 실제 상황이다. 독일에는 원래 대학 등록금이 없었는데, 신자유주의가 한 때 득세하면서 흔히들 보수주의 정당이라고 소개되는 기독교민주당/기독교사회당(CDU/CSU)이 대학의 등록금으로 최고한도 500유로(약 75만원) 정도의 등록금을 대학생들에게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사회민주당(SPD)는 이를 반대했지만 선거에서 승리한 기민당은 이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 대학생들은 기민당의 대학등록금제 부활에 저항하는 시위를 했고, 2005년 이후 사회민주당이 득세한 주에서는 다시 대학등록금을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대학등록금은 사민당이 집권한 주에서는 이미 폐지되었고, 기민당이 정권을 잡은 주에서도 완전히 폐지될 전망이다. 


이것이 소위 ‘신자유주의화’ 되었다고 매스컴을 통해 항상 보도되는 독일 복지국가의 현실이다. 우리나라의 (신)자유주의자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은 유럽도 보수화되었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하지만, 사실 보수화되었다고 비판되는 현재 독일의 모습조차 우리에게는 마치 거의 ‘유토피아’처럼 보이지 않는가?  


“불행히도 사회민주주의는 우리나라의 토양에서 부당하게 억압당한 정치, 경제 체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사회민주주의는 특히 우리사회에서 가장 오해받고 있는 정치, 경제체제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정치적 토양에서 (신)자유주의의 반대는 공산주의라는 이분법이 지배해왔다.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고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로 자리매김해 왔다. 

필자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지> 2013년 12월호, 그리고 2014년 2월호(www.ilemonde.com)에서 언급했듯이, 그러한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 경제 체제는 (신)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모두에서 비판받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체제로 각인되었다. 물론 (신)자유주의자는 사회민주주의를 ‘빨갱이’라고 비판하고, 공산주의자(지젝, 바디우, 네그리, 발리바르 등 ‘철학적’ 공산주의자를 따르는 사람들을 포함)들은 사회민주주의를 수정주의나 개량주의, 즉 ‘자본주의의 앞잡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러한 정신적, 정치철학적 분위기 속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양쪽 모두에서 비판받는 가장 나쁜 ‘정치, 경제체제’라는 해묵은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지배해왔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상상력을 마비시켰고, 보수의 반대는 공산주의라는 진부한 이념 논쟁을 지속시켰으며, 진정한 진보로의 길, 즉 사회민주주의로의 분명한 전환을 막는 요소가 되어왔다. 공산주의자는 레닌 이래로 지금까지도 사회민주주의를 단순히 ‘자본주의의 앞잡이’ 정도로만 생각한다. 지난여름 한국을 방문한 지젝과 바디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사회민주주의, 공산주의, 자유주의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해명함으로써 이러한 문제가 생겨난 이유가 무엇이며, 왜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 경제 체계가 필요한지를 명확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와 비교하면서 사회민주주의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철학적 해명’은 우리나라는 물론 유럽을 포함한 다른 나라에서도 속 시원하게 제시된 바가 없다. 간헐적으로 그러한 시도가 있어왔지만 논의가 매우 추상적이거나 단편적이어서 서양의 정치철학이나 그밖의 문헌들을 읽어보아도 사실 사회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대중, 시민, 지식인들이 사회민주주의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하는 일이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와 반대로 다행히도 사회과학(정치, 경제, 복지 등) 분야에서는 사회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문헌을 상당수 찾아볼 수 있다. 1930년대 스웨덴 사민당은 집권 후 공식적으로 공산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사회민주주의를 채택했다. 독일의 사회민주당은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국유화 및 혁명 노선을 포기하고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공식적으로 택했다. 프랑스 사회당 역시 80년대 초에 같은 길을 걸었다. 이러한 현실 정치의 경험으로 인해 스웨덴과 독일은 물론 그밖의 유럽국가에서 사람들은 사회민주주의의 정치, 경제적 지향과 목표, 그리고 그 현실적 모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으며, 이에 관한 문헌 및 연구자료가 많이 생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유럽에 조차도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스스로 진보적 입장을 취한다는 철학자들, 예컨대 지젝, 바디우, 발리바르, 네그리 등을 포함한 많은 철학자들은 스스로를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 맑스주의자)라고 지칭한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바로 여기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공산주의는 진보가 아닌가? 필자처럼 지젝, 바디우, 네그리 등이 말하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은 모두 보수적인가? 그렇지 않다. 사회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없다면 필자처럼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은 모두 보수적인 사람이 될 것이지만, 사회민주주의라는 현실정치가 북유럽과 서유럽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공산주의에 반대한다고 해서 무조건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고 오히려 공산주의를 주창하는 사람이 실제적으로는 보수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인류가 발명한 ‘사람이 살 만한 최고의 정치, 경제체제’인 사회민주주의를 자본주의와의 타협에 불과하다고 오히려 격렬하게 비판하며, 이를 통해 서민과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고자 하는 사회민주주의적 노력을 무력화시킨다는 점에서 사실상 (신)자유주의를 은밀하게 돕고 있다.


예컨대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에 반대하거나 무관심함으로써 결국은 신자유주의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말로는 자본주의를 극복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자본의 전횡을 막고자 노력하는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앞장서서 반대한다면 그것은 서민, 민중을 위한 정치가 아니다. 공산주의가 진정으로 민중을 위한다고 한다면 제발 ‘딴지 좀 그만 걸고’ (자유주의적인 복지사회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적인 복지국가 건설부터 우선 지지하고 나서야 할 것이다. 


필자는 <사회민주주의, 자유주의, 공산주의>라는 기고문을 연재함으로써 지금까지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던 사회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제시하고, 이와 더불어 왜 우리가 사회민주주의를 우리 사회가 수용하고 구체적으로 적용하고자 노력해야 하는지 그 필요성을 역설하고자 한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보다 명료한 이해를 위해서는 대응 개념으로 항상 등장하는 (신)자유주의, 공산주의라는 개념과 연관시켜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들 정치 이념들은 서로 어떤 관계가 있으며, 왜 갈등하는가? 사회민주주의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무엇이며 왜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 경제 체제는 특히 우리나라의 지적, 정치적 토양에서 사실상 ‘투명인간 취급’을 받아왔는가? 이들 세 개념의 차이를 어떻게 정치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 앞서 첫 번째 기고문인 이 자리에서는 서론 격으로 우선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해묵은 오해 혹은 편견에 대해 해명하고자 한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해묵은 오해와 편견


이는 위에서 간략히 언급했듯이 사회민주주의를 알지 못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맞는 이야기이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평등을 위해 투쟁하고 이를 실제적으로 성취한 진보적인 정치, 경제체제로서의 ‘사회민주주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는 의료, 교육, 육아, 연금 및 실업수당 등 삶의 전분야에서 국민들이 안정적인 삶을 살수 있도록 제도적, 정신적 기반을 마련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념에 근거해 이러한 사회민주주의를 보수적인 체제라고 몰아세우는데 이는 사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필자는 독일유학 당시, 돈을 벌지 못하거나 조금밖에 벌지 못하는 학생(물론 외국인 학생 포함)이나 빈곤층은 한 달에 50마르크(약 27,000원) 정도의 의무의료 보험료를 지불하고 무한대의 의료 서비스를 무상으로 받는 독일의 사회복지제도에 대해 커다란 인상을 받았다. 과연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를 ‘자본과의 타협’이라고 간단히 비판할 수 있을까.  


사회민주주의는 경제주의다? 


이것도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전형적인 레퍼토리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회민주주의는 ‘돈 몇 푼’에 정치, 그리고 더 나아가 정신적인 것 모두를 팔아넘기는 체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공산주의 국가에 진정한 정치, 자유, 정신적 삶이 존재했는가를 우리가 생각해보면 이러한 공산주의적 비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당관료들이 공산주의 이념에 맞지 않는 모든 사상 및 활동(정치를 포함해 문화, 예술, 학문 분야까지)을 실제로 엄청나게 검열, 억압하지 않았는가. 공교롭게도 정치와 학문적 자유를 가장 많이 허용했던 국가는 공산주의자들이 비판하는 사회민주주의 국가인 것이다.   


사민주의가 경제주의라는 비판은 지젝이 레닌을 따라 항상 비판하는 카우츠키 같은 사람에만 해당한다. 칼 카우츠키는 자본주의가 성숙하면 저절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가 도래한다고 믿었다. 지젝은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할 때마다 거의 카우츠키만 인용하는데,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실제로 칼 카우츠키의 이론은 사회민주주의 진영 내에서도 엄청나게 비판받았다. 오늘날 이러한 카우츠키의 경제주의적, 수동적 입장을 받아들이는 사회민주주의자는 아무도 없다. 2차 대전 이후의 독일 사민당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실패한’ 사민당과는 완전히 다르다.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독일 사민당은 계획경제와 폭력혁명 노선을 포기하고, 고유한 의미의 사회민주당으로의 변화에 성공한다. 이를 통해 폭넓은 사민주의적 정책을 제시할 수 있었고 대중의 지지를 얻어 60년대에 집권에 성공한다. 

따라서 과거, 즉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카우츠키의 사민당은 말이 사민당이지 그것은 사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사민당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시 독일 사민당은 여전히 ‘폭력혁명’과 ‘국유화’ 정책을 강령으로 채택하고 있었고 따라서 복지정책, 경기부양정책 등 다양한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이념을 갖출 수 없었다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는 사민당이었다”


하지만 지젝을 포함한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할 때 주로 실패한 카우츠키만을 대상으로 삼지, 실제로 성공을 거둔 수많은 사민당(전후의 독일 사민당을 포함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현재 구체적인 정치적 행동,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회민주주의자는 아무도 없는데 마치 사회민주주의자는 모두 ‘카우츠키적’이라는 왜곡된 이미지를 심고자 노력하고, 이러한 왜곡의 시도는 이미 실제로 상당부분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자는 마치 사회민주주의가 경제적 변수만을 고려하는 경제주의(혹은 카우츠키주의)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몰아세우므로, 지젝 독자들은 그러한 편견에 빠지기 쉽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편견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사회민주주의는 경제주의가 아니라 다원주의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회민주주의는 경제주의가 아니라 다원주의이다. 그것은 경제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과연 누가 경제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다양한 삶의 가치, 즉 정신적인 다양한 삶의 가치를  ‘원칙적으로’ 존중하는 다원적인 삶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는 ‘이념’, 즉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의 ‘가증스러운 전횡’을 사회적으로 통제하고 이를 바탕으로 각 개인에게 자유로운 삶의 공간을 열어주며, 그가 지향하는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고자 노력하는 삶의 양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념에 맞지 않는 생각이나 태도들을 억압했다. 예컨대 맑스-엥겔스의 유물론적 ‘교리’에 맞지 않는 이론이나 사상은 손쉽게 무가치한 것으로 버려졌다. 현대의 공산주의자들도 겉으로는 유연한 척 하지만 실제로는 ‘자본의 철폐’를 ‘교조적으로’ 주장할 뿐만 아니라 ‘의회민주주의’와 민주적인 토론의 가치, 그리고 종교적 가치나 학문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경제와 관련해서도 공산주의자는 사회민주주의가 경제주의라고 매번 왜곡하지만 진정한 경제주의자는 공산주의자가 아닌가? 결국 그들은 ‘자본을 철폐’하지 않으면 사회민주주의조차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결국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경제주의자가 아닌가?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젝이 종종 활용하는 ‘궤변’이 있다. 그는 어차피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므로 전체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즉 자유주의는 결국 전체주의이고, 민주주의라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므로 결국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전체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젝은 자유로운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아닌 전체주의적 공산주의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체주의에 대한 환상, 이는 지젝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맑스-레닌주의자가 공유하는 ‘은밀한’ 환상이기도 하다. 지젝을 읽는 독자들은 지젝이 ‘공산주의는 전체주의’라고 말할 때 종종 이를 은유적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지젝의 책을 읽어보면 지젝은 이를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즉 문자적 의미로 그렇게 주장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물론 지젝이 진정으로 전체주의를 주장하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독자도 존재할 것이다.  


지젝은 개념적 모호함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잘 활용할 줄 아는 뛰어난 대중심리학자인 것이다. 예컨대 라깡의 유명세를 잘 활용할 줄 아는 지젝은 종종 ‘정신분석가는 스탈린주의자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지젝의 ‘모호한’ 말은 매우 기묘한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표현은 라깡의 유명세를 슬쩍 등에 업고 마치 라깡이 공산주의 이론가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의 정당성을 암암리에 독자들에 머리에 세뇌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물론 공산주의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겠지만 항상 그들은 자본의 철폐라는 ‘최종대답’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경제주의자다. 자본을 철폐하지 않으면, 즉 자본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우리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강단 공산주의자의 가장 ‘오만하고 위험한 환상’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의 목표가 ‘자본의 사회적 통제’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오직 분배정책에만 관심 있다고 호도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와 자유주의적 복지정책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은폐하고자 한다. 그리고는 공산주의적 방식으로 자본을 ‘철폐’하는 것만이 가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본을 철폐했다고 주장했던 현실적 공산주의가 실제로 자본을 철폐했고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는 국가를 만들었는가? 현실 사회주의국가에서도 자본은 철폐되지 않고 그것은 결국 공산당 관료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구소련과 같은 현실 사회주의국가는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했으며, 그것도 매우 억압적인 국가자본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구소련의 경우, 헝가리, 체코 침공, 강제수용소 등에서 그것은 잘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과거 대부분의 서유럽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는 지위에 있었다는 점도 지적할 만하다.


구동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동독의 민중들은 다름 아닌 억압적인 국가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면서 <우리가 민중이다!(Wir sind das Volk!)라고 외쳤다. 공산주의 국가에는 복지체계라는 것이 필요 없었다. ‘공식적으로’ 모두가 잘 사는 유토피아인 공산주의 국가에서 복지체계란 존재해서는 안 되는 독소였다.


사회민주주의가 다원적이라 함은 사회민주주의 국가는 정치적으로도 자유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자유, 정신적 활동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자유의 발현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경제적 궁핍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하고(복지), 이를 위해 자본의 ‘가증스러운’ 전횡을 사회적으로 통제하고자 한다. 이것이 과연 공산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경제주의인가? 사회민주주의는 경제적 빈곤으로 인한 자유의 상실을 막는 제도적 장치를 발전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는 이러한 사회민주주의를 경제주의라고 비판한다. 즉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를 경제주의라고 비판할 때 그들은,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의 시민들이 돈 몇 푼 받고 아무 생각도 안하는, 즉 영혼도 없고 정신적 활동도 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정치적 사유’를 포기한 ‘배부른 돼지’라고 사실상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만과 편견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공영방송에서는 정치토론 프로그램이 무척 많다. 이것만 제대로 보아도 사회민주주의가 경제주의라는 비판은 하지 않을 것이다. 독일의 ARD 혹은 ZDF와 같은 공영방송의 토론 프로그램만 보아도 정치가들이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방청객의 날카로운 공격을 받는다. 그런데 그들이 배부른 돼지라니! 


정치를 사유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현장 속에서 사유를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한다. 지젝, 바디우, 네그리, 발리바르 등의 책을 읽는 것과 공산주의적 실천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물론 ‘친북 자주파’는 이와는 다른 논리를 갖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란 공산주의 철학자들의 견해와 동일한 것이며, 이들을 비판하는 것은 커다란 불경죄를 범하는 일이다.  


“사회민주주의는 공산주의로 가는 과정일 뿐?”

“멋지고 좋은 말’만 하면 되는 것이 공산주의인가? 이러한 공산주의는 지상의 삶은 모두 지옥이므로 천국에 가면 모두가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지극히 보수적인 종교적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이것도 공산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전형적인 사회민주주의 폄하의 논리 중 하나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구소련이나 동독 등 현실 공산주의의 참담한 모습을 비판하면,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은 현실 공산주의일 뿐이라고 대답한다. 진정한 공산주의는 그런 현실과는 상관없는 유토피아적 이념이며 ‘철학적’ 개념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이러한 논리를 통해 공산주의자는 현실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등 구체적인 개입을 해야 할 책임으로부터 면제받고, 비판을 위한 비판만 해도 되는 특권을 부여받게 된다. ‘멋지고 좋은 말’만 하면 되는 것이 공산주의인가? 이러한 공산주의는 지상의 삶은 모두 지옥이므로 천국에 가면 모두가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지극히 보수적인 종교적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지젝이나 바디우가 구체적인 현실 개입의 방법으로 ‘의회민주주의 거부’, 즉 ‘선거 거부’와 같은 극단적 방법 밖에 제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젝은 중국이나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종종 이야기한다. 지젝의 이러한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북한과 중국이 유토피아 국가가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그런데 지젝의 이러한 뻔한 말에 열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회민주주의 이론의 기초를 닦았던 베른슈타인(Berstein)의 견해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베른슈타인에게 사회민주주의란 ‘지금-여기에서 실현된, 그리고 실현되고 있는 공산주의 그 자체’이다. 물론 베른슈타인이 사회민주주의는 공산주의로 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공산주의자, 즉 맑스-레닌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베른슈타인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맑스-레닌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 그리고 공산주의로 가기 위해 거쳐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사실상 사회민주주의적 과정을 ‘생략’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른슈타인은 공산주의로 가는 과정으로서 사회민주주의를 말했지만, 동시에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맑스의 교의 역시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가운데 발전하는 것인 한 그것은 실천의 영역으로 옮겨져야 하는 것인데, 그러나 그러한 실천적 적용은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사회주의의 최종목적을 포기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옳다. 내가 볼 때 맑스 이론은 사실상 ‘최종목적’에 관한 이념을 버렸기 때문이다. 발전 사상에 바탕을 둔 사회 이론의 경우, 최종 목적이란 존재할 수 없다.”(에두하르트 베른슈타인(송병헌 옮김),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책세상, 71면)    


여기에서 베른슈타인은 맑스 이론이 최종목적을 포기했다고 ‘해석’함으로써 정통 맑스-레닌주의를 사회민주주의로 재해석한다. 베른슈타인은 맑스가 최종목적에 관한 이념을 버렸다고 말함으로써 맑스를 사회민주주의적으로 ‘수정’하고 있다. 우리는 이 인용문을 통해 베른슈타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현대철학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종목적이라는 형이상학적 실체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공산주의가 최종목적을 갖고 있지 않은 현재적 운동임을 간파했다. 그는 맑스주의, 정치, 경제철학 분야에서 ‘현전의 형이상학’을 넘어설 수 있었던 탁월한 이론가요 실천가였다. 


유토피아를 바라보는 데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첫째, 하나는 모든 해결책을 항상 미래로 투사하고, 지금은 말만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태도가 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신경증적 태도이다. 공산주의가 자동적으로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던 카우츠키가 그랬고, 오늘날 ‘철학적’ 공산주의가 그러하다. 공산주의는 현실이 아니라 철학적 이념이라는 논리 말이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구체적으로 공산주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사회민주주의 게임에 전혀 들어오지 않고 링 바깥에서 해설만 하는 해설자 같은 태도를 보인다. 우리는 해설자들이 경기를 하면 월드컵에서 우승할 것이다라는 농담을 하곤 한다. 아마도 공산주의자들이 모두 해설자로 모이면 순식간에 세상은 유토피아로 바뀔 것이다.  


둘째, 불완전하지만 지금-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유토피아를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것, 바로 이러한 태도가 사회민주주의적 태도이다. 신학적 개념을 사용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죽은 후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적 과정이다. 현실화된 공산주의인 사회민주주의를 끝없이 비판하거나 그저 ‘거쳐 가는 하나의 일시적 현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죽은 후에 천국 가기를 기다리며 기도만 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의 태도와 똑 같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지금-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도록 (기도하면서)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기독교 신학적 개념에 따르면 천국은 이미 도래했으며, 앞으로 계속 도래할 그 무엇이다(신학에서는 이를 Already, Not-yet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이 정확히 사회민주주의적 태도이다. 지젝과 이택광과 같은 공산주의자는 천국을 미래에 임할 그 무엇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공산주의자가 ’사회민주주의는 공산주의로 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로 가는 과정일 뿐이므로 사회민주주의는 사실상 무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과정에 지나지 않는 사회민주주의가 공산주의라는 최종목적에 도달하는 것을 결정적으로 방해하는 진정한 주적일 수 있다는 (망상적인) 믿음을 그들은 또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공산주의의 진정한 적이 사회민주주의일 수 있는 이유이며, 맑스와 레닌, 스탈린 등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를 싫어했던 이유이다. 바로 그것이 공산주의자가 스스로 매우 진보적인 척하지만 공교롭게도 종종 매우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유인 것이다. 


반면, 베른슈타인에 따르면 공산주의의 실현된 모습이 다름 아닌 사민주의다. ‘유토피아’는 사회민주주의를 통해 이미 실현되었으며, 실현과정에 있으며, 앞으로 계속 실현될 것이다. 이러한 사민주의 자체가 ‘이미’ 공산주의이다. 지젝도 좋아하는 헤겔의 『대논리학』에 나오는 용어로 설명하면 본질은 가상과 일치한다. 본질은 눈앞에 있는 구체적인 사물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라는 본질은 사회민주주의 너머에, 즉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 어디엔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라는 현실적 사물 속에 존재한다.


-이 글은 사민저널(www.sdjournal.kr) 4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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