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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은 유민(流民) 사회의 예견된 인문학적 재난이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6.15
첨부파일0
조회수
735
내용

2014-전기 학회-라강학회 라운트테이블-내용 4


세월호 침몰은 유민(流民) 사회의 예견된 인문학적 재난이다

 

정경훈(아주대)


  세월호가 침몰한지 2주가 지난 어느 날 무엇인가가 계속 잡아당겨 할 수 없이 팽목항을 방문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오전에 다녀갔다는데 분위기는 썰렁했다. 희생자 가족들이 머무는 텐트의 바깥 쪽 하얀 벽면에 까만 싸인펜으로 가냘프게 쓰인 글귀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어여와라 잔소리 그만할게,”“오늘 본 나뭇잎이 너무 파랬다/ 또, 해가졌다,”“나는 우리가 좋은 이별로 끝낼 수 없다는 게 전혀 슬프지 않다./ 나는 우리가 좋은 인연이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너는 내게 그 자체 그 순간만으로도 완벽했다.”


어린 자식을 저 차디찬 바다에 잃어버린 부모의 애끓는 마음이 배어있는 글귀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했다. 팽목항 바닷가 콘크리트바닥엔 탁자가 하나 있었고, 거기엔 집에 오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이 와서 먹으라고 부모들이 갖다 놓은 초코파이, 핏자 등이 바닷바람에 말라 가고 있었다. 나는 바다를 향해 쉼 없이 염불하는 스님을 따라 횡사한 아이들의 극락왕생을 기도했다.


귀경길에 희생자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진 안산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밤 12시가 되었으나 조문객들이 줄지어있었다. 분향소 실내로 들어서자 맞은편에 수백 개의 영정과 위패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거대한 영정들 앞에 가슴이 철렁했다. 영정들에게 가까이 가자, 아이들이 죽기 전에 부모에게 보낸 동영상이 눈앞에 어른거렸고, 귓가엔 무서움의 엄습을 막으려 서로 격려하며 재잘거리던 아이들의 소리가 쟁쟁했다. 이들은 왜 여기에 있는가? 도대체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분노가 치솟았다. 도대체 왜 이준석 선장과 승무원들은 이들을 버리고 자기들만 탈출했는가? 해경은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뭘 했는가? 비리와 부정과 탐욕으로 사업을 해온 유병언은 측은지심이 없는 괴물인가? 유병언과 이준석은 본래부터 괴물인가?


이준석 선장과 승무원들, 해경, 청해진 회사 경영진, 실소유주 유병언 일가, 해운업 관련 공무원들 등 세월호 참사를 만든 이들에게 공통적인 점은 ‘나’제일주의, 이익의 숭배였다. 이들에겐 승객 등 타자의 입장에 대한 배려나 어려운 처지에 처한 타자에 대한 책임성을 느끼는 타자윤리의 감성과 의식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다. 이들에겐 타자와 함께 서로를 지켜주고 상생한다는 공동체 의식이 결여되었고, 오로지 나의 이익만이 중요했다. 이것이 이들을 괴물로 만들었다. 이 괴물은 어디서 왔는가? 이들은 본래부터 그런 괴물이었나? 세월호 침몰은 이들만이 만든 것인가?


정신분석가 프로이트와 사회철학자 알튀세에 따르면, 신체적 증상(symptom)은 많은 심리적 요인과 기억들이 중층결정(overdetermination)되어 발생하고, 사회적 사건도 수많은 사회적 요소들과 역사적 기억들이 중층결정하여 일어난다. 세월호 침몰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몇 몇 사람들만이 가담하여 일으키지 않았다. 유병언, 이준석, 해경은 세월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곳곳에 있다. ‘나’ 제일주의와 이익의 숭배, 타자 무관심, 윤리감성과 공동체 의식의 결여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라면, 이 원인은 이 땅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자라났다.


공동체 의식의 결여는 일제의 조선 강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피식민지 조선인들은 자신을 지켜줄 조국이 없었기에, 만주, 상해, 일본 등으로 이주 가든, 조선 땅에서 살든, 이들은 자기를 지켜줄 공동체가 없는 유민(流民)이었다. 이들이 사는 땅의 법과 질서는 이들이 긍정하고 내면화하고 자기화할 수 있는 공동체의 법과 질서가 아니라 이들을 억압하는 압제자의 것이거나 이들에게 무관심하거나 냉정하거나 박대하는 다른 나라의 것이었다. 당연히 조국이 없는 유민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생존이었고, 자기 생존을 위해 중요한 돈과 권력이었다. 공동체를 소중하게 느끼거나, 공동체 안의 이웃 타자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지는 윤리의식이 이들에게 심각하게 결핍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 이후 우리 역사는 이준석 선장의 위대한 선배를 목격하게 되었다. 6.25전쟁 중 북한군에 의해 서울이 함락당할 때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 시민들에게 자신은 “서울을 사수할 것”이라고 말하여 시민들이 피난 가는 것을 막은 후 한강철교를 끊게 해서 서울에 머물던 많은 시민들을 북한군 점령의 희생양이 되게 만들었다. 국민의 생명을 중시해야하는 대통령으로서 그는 “부끄럽게도 서울을 지킬 능력이 없으니 시민들이 각자 피하라”고 알렸어야 했다. 초대 대통령의 이런 모습은 대한민국의 인간성의 비극이요 인문적 재난이었다. 이를 본 한국국민들에게 국가가 무엇이었겠는가? 어려울 때 서로를 지켜줄 공동체가 어디 있었겠는가? 이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에 살면서 조국이 없는 유민이었다. 일제 때처럼 이들이 기댈 것은 자기 몸뚱이와 돈뿐이었다.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동안 법과 질서와 윤리는 권력과 금력의 하수인이 되거나 왜곡되었다. 그러면서 공동체 의식이 결여된 유민 의식은 ‘나’제일주의, 이익과 돈과 성공의 숭배로 진화했고 이러한 정신과 문화는 시대정신이 되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70-80년대 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이 독재에 저항한 결과로 대한민국 법에 의해 실형을 선고 받고 고초를 겪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고, 상식을 과도하게 벗어난 이상한 판정인 bbk 판정을 받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았고, 천안함 사건에서 북한 어뢰의 공격을 막지 못해 많은 병사들을 죽게 만들었는데도 책임있는 자리에 있었던 장군들 중 어느 누구도 처벌받거나 책임지기는커녕 승진하는 경우를 보았고, 많은 재벌들이 심각한 위법행위를 했음에도 쉽게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것을 보았고, 국정원이 선거개입을 하여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위법한 일을 한 것이 분명한데도 제대로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았다. 수 십 년 동안 윤리는 물론이고 공동체의 최소 근간인 법과 질서를 깨버려도 권력과 돈이 있으면 법과 권력이 용서를 해주는 것을 보아온 이 땅의 보통 사람들이 돈과 권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고, 권력과 돈을 쟁취하는 데에 성공하는 것을 최고 가치로 여기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권력, 돈, 성공의 숭배가 대한민국의 교육을 움직이는 지배철학이 된 것도 당연하다. 정상적인 공동체라면 구성원 간의 배려와 책임이 중요한 것임을 초중등 교육이 비중 있게 가르쳐야 할텐데, 대학입시를 위한 성적과 경쟁만이 강조되고, 인성교육은 쓸모없는 장식품으로 전락하였다. 대학에서도 학생에겐 성적과 취업이, 교수에겐 연구업적이 최고가치가 된지 오래되었다. 대학에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큰 배움’(大學)은 사라지고 돈에 따라 움직이는 업적제조기계들만 우글거리고 있다.


자살률 최고, 노동시간 최고, 1인당 술소비 최고, 노인들의 만족도 최저, 정신장애발생률의 꾸준한 증가 등 화려한 기록을 가진 이 사회에게 이 땅의 예술가들은 경고음을 울려왔다. 이창동 감독의 <시>와 <밀양>,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등이 그것인데, 특히 타자의 슬픔에 무감각한 사회를 그린 <시>는 세월호 사건의 알레고리였다. 세계 영화제가 이들을 알아본 것과 달리 한국 대중은 이들을 외면했다. 이들의 흥행은 저조했다. 예술가들의 경고음은 또렷하게 울렸지만, 귀 먹은 사회에 세월호 참사는 다가오고 있었다.

 

세월호 침몰은 성공과 돈과 권력을 숭배하고, ‘나’만을 중시하고, 내가 불편하면 타자에 대한 책임을 언제든지 내버릴 수 있는 ‘보통’사람들이 곳곳에 있는 대한민국 유민 사회의 예견된 인간성 침몰이요, 인문학적 재난이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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