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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애도와 멜랑꼴리, 그리고 행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6.15
첨부파일0
조회수
1049
내용

2014-전기 학회-라강학회 라운트테이블-내용 3


애도와 멜랑꼴리, 그리고 행위

홍준기(프로이트 라깡 정신분석연구소 소장)


 정신분석가 라깡은 『세미나 6권: 욕망의 그것의 해석』에서 멜랑꼴리를 설명하면서 <햄릿>을 상세히 분석한 바 있다. 이하에서는 프로이트와 라깡, 그리고 클라인 정신분석 이론을 바탕으로 햄릿의 멜랑꼴리의 윤리적, 정치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왜 햄릿은 오랜 시간 멜랑꼴리에 빠져 무기력한 삶을 살았으며, 심지어 정신병자인 것처럼 행동하며 절망했는가? 햄릿의 비극적인 삶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절망, 분노, 그리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하는 죄의식을 동반하는 멜랑꼴리로 표현되었다. 그는 오랜 세월을 무기력하게 살다가 결국은 왕의 음모에 빠져 레이티어스와 결투를 하고 독이 든 칼에 찔려 죽어가는 것으로 삶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죽어가는 바로 그 순간에야 비로소 햄릿은 삼촌에게 독이 든 잔을 먹이고 아버지 원수를 갚을 수 있었다.


애도하지 못하는 주체, 즉 햄릿처럼 멜랑꼴리에 빠진 주체는 ‘행위’(acte)하지 못한다. 그리고 애도되지 못한 죽음은 유령으로 되돌아온다. 햄릿의 아버지는 천국에서 쉼을 얻지 못하고 아들을 찾아와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한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죽음의 원수를 갚아 줄 것을 요청한다.

왜 햄릿은 애도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멜랑꼴리 환자로, 그리고 아버지 원수를 갚지 못하고 그렇게 무기력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는가? 라깡에 따르면 이는 햄릿이 어머니의 욕망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햄릿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살해한 삼촌과 결혼했다. 햄릿은 삼촌에 대한 어머니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므로, 더 정확히 말하면 삼촌에 대한 어머니의 욕망을 거역할 수 없으므로 삼촌에게 복수하지 못한다. 햄릿은 어머니의 권력과 쾌락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통해 사건의 전모를 듣고, ‘유명한’ 연극 장면을 통해 삼촌의 범죄를 확인했음에도 여전히 행위(acte)하지 못한다.


햄릿은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의 욕망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햄릿은 이러한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으므로 행동할 수 없었고 따라서 아버지를 진정으로 애도할 수 없었다.

햄릿의 무기력한 멜랑꼴리는 팔루스적 가치를 상실한 혐오스러운 대상인 어머니와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동일화했기 때문에 생겨났다. 그리하여 그는 죄의식에 빠져 스스로를 자책하고, 무기력한 삶을 보냈으며, 또한 행위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은폐하기 위해 정신병자가 된 척 행동하기도 한다. 그는 아버지를 천국으로 보내드리지 못하는 조울증 환자로 전락한다. 그리하여 그는 어머니와 삼촌에게 표출해야 할 분노를 자신에게 향한다. 바로 그것이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멜랑꼴리의 본질이다.


햄릿의 병적 멜랑꼴리는 조증적(maniac) 상태에서 원한에 찬 부당한 분노, 조증적 방어로 표출된다. 햄릿의 비난은 사건과 무관한 다른 무력한 타자에게 전가된다. 어머니의 외설적인 욕망과 권력과 분리되지 못한 햄릿의 무의식에서 연인 오펠리어스가 혐오스러운 대상인 어머니와 동일화된다. 그리고 분노에 찬 햄릿은 자신의 애인인 오펠리어스와 결별을 선언하며, 결국 그녀는 자살한다.

햄릿은 결국 죽음의 순간에 애도작업을 완수하고, 행위할 수 있었다. 자신이 동일화하고 있었던 어머니가 실수로 독잔을 마시고 죽을 때, 그는 어머니로부터 분리된다. 그러나 그 역시도 독이 묻은 칼에 찔려 죽임을 당한다. 여기에서 어머니의 죽음과 햄릿의 죽음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이 드라마의 구조에서는 필연적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곧 그녀와 동일화한 햄릿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햄릿은 어머니와의 멜랑꼴리적 동일화로부터 벗어나 욕망을 회복한다. 멜랑꼴리로부터 벗어나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행위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세월호 사건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우울과 죄의식, 절망을 경험하고 있다. 햄릿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이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우리의 집단적 멜랑꼴리에 대해 던지는 함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1) 어떤 경우도 납득할 수 없는 부당한 죽음의 경우 그것은 결코 개인 심리치료를 통해 해결될 수 없다. 물론 일정 정도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사회적 차원에서의 ‘정의 실현’을 통해서만 해결 가능하다.


(2) 이러한 차원을 망각한 심리치료는 종종 진리를 은폐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살아 있는 인명구조에 그렇게 무심했던 정부와 행정관료들이 구조된 사람들의 심리치료를 위해서 그렇게 빠른 속도로 정신과의사를 배치할 수 있었던 그 기동력이 놀라울 뿐이다!


(3) 햄릿의 이야기는 멜랑꼴리 역시 권력과 외설적 쾌락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남편을 살해한 사람과 결혼한 왕비가 있다. 그리고 즉 어머니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아니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우유부단한 햄릿이 있다. 이러한 어머니의 욕망과 동일화했기 때문에 햄릿은 복수하지 못하고 멜랑꼴리에 빠진다.


(4) 햄릿의 멜랑꼴리, 즉 행위하지 못함은 권력과 외설적인 성적 쾌락에 무의식적으로 동참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햄릿이 행위하지 못하는 한 아버지는 유령으로 배회하며 햄릿을 계속 찾아올 것이다.


(5) 햄릿 드라마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멜랑꼴리를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준 마지막 단계가 무엇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행위이다. 그러나 행위하기 위해, 즉 진정한 애도작업을 할 수 있기 위해 햄릿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했다. 햄릿은 레이티어스의 독이 묻은 칼에 맞아 죽어가면서 왕에게 독이 든 잔을 마시게 한다. 햄릿의 죽음의 순간을 은유적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멜랑꼴리 환자의 자살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햄릿을 단순히 죽음 혹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운의 멜랑꼴리환자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상징적) 죽음의 순간에 그는 자신이 동참하고 있던 사악한 권력, 외설스러운 쾌락으로부터 진정으로 분리된다(멜라니 클라인에 따르면 자살이란 자신의 좋은 내적 대상을 ‘나쁜 대상’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윤리적 행위이다). 그리하여 그는 행위 할 수 있었고 진정한 애도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6) 또한 『세미나 7권: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라깡은 안티고네 사례를 분석한 바 있다. 안티고네는 독재자 크레온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죽임을 당한 오빠 폴리네케이스를 매장해준다. 반역죄를 저지른 안티고네는 동굴에 갇힌다. 햄릿 분석에 이어서 바로 이어서 행한 세미나에서 라깡이 <안티고네>를 분석한 것은 우연이 아닌 듯 보인다. 우리는 <안티고네>를 오빠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 관한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안티고네의 행위는 반역적이다. 그럼에도 안티고네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반역자인 오빠를 매장하고 장례식을 치루는 행위를 통해서만 진정한 애도가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안티고네의 애도 행위는 동시에 크레온에게 저항하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


(7) 멜랑꼴리에 대한 라깡의 분석은 개인과 사회는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이 두 작품과 이에 대한 라깡의 해석은 진정한 애도는 ‘궁극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행위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권력과 외설적 쾌락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부당하게 죽은 사람들을 자신의 쉼터로 돌려보내지 못하는 무력한 멜랑꼴리자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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